심심하기도 하고 새삼스럽게 한 번 다시 볼까,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제 새벽에 99-00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다시 봤다. 그리고는 후회했다. 어쩌자고 그 시간,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꽉 쥐고 그 경기를 다시 본걸까. 그것도 끝까지. 진 경기를 다시 보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이다. 그래서 이번엔 이기는 경기를 보자- 하는 생각에 딱 떠오른 경기가 유로 2000에서 8강 진출을 놓고 조별리그의 마지막에 붙었던 유고와의 경기였다. 4-3 이라는 엄청난 스코어에, 종료 20여초를 남겨두고 터진 짜릿한 역전골! 이라는 아주 희미한 기억만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겠지만, 조금만 더 이성적으로 생각했더라면 나는 결코 이 경기를 고르지 않았을거다 ㄱ- 사실 선수들이 입장하는 순간, 아차 싶었으니까. 그래도 기왕 보기로 한 거 어제보다 심할쏘냐- 하면서 봤는데, 심했다. 어제보다 더. 이틀 연속 카니님이 3실점하는 경기를 보다니. 나도 참 자학적이다. 혹시 마조히스트라던가?

  이 경기가 어제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카니님이 연달아 3실점을 한 경기를 봤다, 라는 이유도 크지만 그보다 후반전, 2 - 2 의  팽팽한 상황에서 순간적인 판단미스로 수비수가 발로 연결해 준 공을 손으로 잡아버린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ㄱ- 덕분에 PK 만큼 끔찍한 위치에서 간접 프리킥을 내줘버렸고. 그게 골로 연결되진 않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도 정말, 끔찍했다. 진짜로. 그 후에 추가 실점을 하는 바람에 결국은 3실점을 하고 경기 종료 직전까지 내내 2 - 3 으로 끌려가는 스코어를 보면서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. 실점 = 골키퍼의 잘못 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.

  5분여가 주어진 추가 시간에 PK 을 얻고 멘디에타가 깔끔하게 성공해 3 - 3 동점. 경기 종료 20여초를 남겨두고 첫번째 골을 넣었던 알폰소가 결승골. 그 순간 다른 누구보다도 기뻐하며 달려나온 사람. 위에 올린 사진은 경기가 끝난 후, 홀로 공을 부여잡고 골대 앞에서 한참을 엎드려 있던 카니님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 뒤에서부터 두다다다 달려와서는 냉큼 안기는 슈퍼스타 라울과의 투샷이다. 정말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을 멋지게 캐치해내 정지된 장면으로 보여주는 이 사진은 정말 한없이 따뜻하고 고맙다.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에 하나다. 새삼스레 이번 월드컵, 튀니지전에서 라울이 동점골을 넣고는 벤치에 있던 카니님에게 두다다 달려와 축하의 포옹을 하던 장면이 오버랩되는 건 왜지. 그나저나 내일은 무슨 경기를 봐야할 지 고민된다 ㄱ- 아무래도 리그 경기를 봐야겠다. 무실점으로 슈퍼 퍼펙트 세이브 하는 거 찾아서 봐야지. 끙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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Posted by 銀_Ryan :